인 정지용은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 서문에서 시인 윤동주를 두고

‘겨울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차갑게 얼어붙은 시대 속에서 표표히 자신의 길로 나아갔던 윤동주의 곱고 바른 시혼(詩魂)을 빗댄 말일 것이다.

그리고 2017년,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속에서 윤동주의 맑은 시혼이 박영수와 온주완 두 명의 청년 배우를 통해 되살아날 준비 중이다.

editor 정지혜, 김은아

photographer 황종현

hair&makeup진아&소희(엔끌로에)

stylist 김민정(온주완)

place 롯데호텔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배우 박영수

서울예술단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선연하다. 좋아하던 윤동주 시인을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에 투영해서 본다는 건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특히 2막 종반부, 땀과 눈물에 젖어 ‘별 헤는 밤’을 소리 높여 부르짖고 있던 박영수는 그 순간, 정말로 시인 같았다. 그 이후로 내게 박영수는 윤동주 시인하면 연관검색어처럼 함께 떠오르는 존재가 되었다. 2012년, 2013년, 2016년에 이어 올해로 벌써 네 번째 <윤동주, 달을 쏘다>를 맞이하게 된 박영수는 이제 완연한 뮤지컬 스타이지만,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단독 주역을 맡아 오른 무대였는데, 객원 배우가 아닌 서울예술단 단원이 원탑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도 흔치 않았던 때였다. 박영수는 당시를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까. “처음 윤동주 역으로 독회 했을 때 작품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어요.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강렬하게 가슴에 와 닿았거든요. 당시의 제 역량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역할이었죠.” 첫 무대를 어떻게 마쳤는지, 5회 차를 어떻게 연기했는지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단 하나 기억하는 것은 첫 공연이 마지막 공연 같았던,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4층 전체를 울렸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뿐이라면서. “초연 때 정말 ‘죽을 둥 살 둥’ 했어요. 공연하는 동안 몸이 안 좋아서 링거를 맞은 것도, 혼자 밥 먹으면서 울어본 것도 처음이었어요. ‘내가 무슨 뮤지컬이냐. 역량이 여기까지인가 보다’하고 정말 다 그만두려고 했어요.”

하지만 무대 아래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윤동주, 달을 쏘다>로 다소 침체기에 빠져 있던 서울예술단은 화려한 중흥기를 맞이했고, 박영수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역량의 한계까지 내몰린 젊은 배우의 절실함과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냈던 젊은 시인의 고뇌가 맞닿아서 였을까. 박영수의 절박한 연기는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그는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2017년, 박영수의 고민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 과연 극중 윤동주의 치열한 번민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다다라 있었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혹시 제가 외롭게 돌아가신 시인을 대하는데 무뎌지진 않았을지, 처절함과 거리가 생긴 것은 아닐지 조금 걱정이 되었어요. 제가 그 분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행복감에 쌓여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또 다른 고충은 이미 작품에 젖어있는 자신이었다. 초연부터 몸에 밴 감정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처럼 그를 예민하게 들쑤셨고, 실제로 그의 큰 눈에는 인터뷰 내도록 눈물이 고여 있었다. <윤동주, 달을 쏘다>와 관련된 인터뷰를 할 때 마다 이렇게 되어버린다며 박영수는 무안해 했다. “이젠 무뎌질 때도 됐는데 조금만 찔러도 아파져요. 그게 문제예요. 오늘도 연습실에서 ‘사라진 봄’ 장면을 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시대적 상황에 분노했으면 했지 울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요. 윤동주 시인도 시대적 상황을 버티고 견디면서 시에 자신의 고뇌를 담았을 테고요. 제가 이렇게 아픈 건 이미 당대를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절대 좋은 태도가 아니죠. 계속 감정을 버티며 절제하려고 노력 하는데, 아직도 어렵네요. 참아왔던 감정들을 마지막 장면에서 터트릴 수 있도록 잘 밀어내고 견뎌야 하는 게 이번 공연의 숙제일 것 같아요.”

2016년과 2017년 사이 그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지난 달 결혼식을 올린 것이고 두 번째는 지난해 말 서울예술단을 나오게 된 것이다. 탈단 소식을 어떻게 전할지 몰라 그 동안 인터뷰를 완곡히 거절해왔다는 박영수는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재작년 12월 정도부터 고민했던 일이에요. 꽤 오래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죠.” 정해진 한해 라인업을 반드시 소화해야 하는 서울예술단의 작품에 간판스타로 출연하면서 외부 일정을 동시에 소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체력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이 문제였다. 외부 스케줄로 서울예술단 일정을 빠져야 할 때면 양쪽 단체에 미안한 상황이 반복되었고, 공연 준비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야만 했다. 의무감이 아닌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무대에 오르기 위해 결정한 일이었다. “제 배우 인생 대부분을 보낸 곳이라 결정을 내린 뒤에도 마음이 많이 복잡했어요. 정신없이 예술단과 외부를 오가면서 활동한 게 4년 정도 되는데, 스스로 많이 피폐해졌던 것 같아요. 단체를 나왔음에도 이렇게 불러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긴 시간 윤동주라는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박영수가 깨달은 것은 “윤동주는 절대 유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말세기와 빠르기는 급격히 가팔라졌고, 억양도 거세졌다. “정말 강단 있는 분이에요. 바깥에 나가 독립을 외치지 않았다고 해서 ‘유약’하다고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고 생각합니다. 시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던 윤동주 시인은 문학인으로서 비극적인 시대를 시로 담아냈어요. 그리고 그 작품들은 후손에게 남겨져 당대를 비춰볼 수 있는 자료가 되었고요. 시에 대한 확고함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된 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사상범’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았던 시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연이어 열변을 토했다. “그 분은 재판장에서 자신의 죄목을 모두 인정했어요. 오히려 독립될 것을 알기에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실력 양성에 힘써야 한다고 자신의 소견을 당당하게 밝혔죠. 시대를 탓하거나 타인을 비꼬지도 않았어요. 썩어빠진 세상에서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써 내려갔다는 것은 웬만한 고집과 강단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터뷰 당일은 윤동주 시인의 서거일인 2월 16일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윤동주 시인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있냐고 묻자 그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고 목소리도 심하게 떨려왔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박영수는 작은 소리로 겨우 “감사합니다”라고 내뱉었다. “그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만날 수 있다면 안아드리고 싶은데… 공연을 하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 줄 시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데워주고 계시잖아요. 정작 본인은 차가운 바닥에서 돌아가셨으면서…”

불운한 시대 속에서 윤동주는 끊임없이 자기 성찰의 언어로 시를 썼다. 누구보다 자신의 문학을 진지한 태도로 응시했고, 삶에서는 고요하지만 뜨겁게 ‘부끄러울 줄 아는 태도’를 견지했다. 박영수는 윤동주를 연기하며 스스로도 모르게 시인의 굳건한 태도를 배웠던 것일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어투가 무사(武士)처럼 강직했다. “오늘 팬 분들이 연습실로 간식을 보내주셨어요. 제가 뭐라고 이렇게 잘 해주실까 싶더라고요. 감사해서라도 무대에서 물러서지 않으려고요. 더디더라도 제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고 사력을 다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제 중심이고, 미련하지만 제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이니까요.” editor 정지혜

"이젠 무뎌질 때도 됐는데 조금만 찔러도 아파져요.